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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령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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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1741년 비투스 베링의 탐험 이후 러시아가 북아메리카에 건설한 식민지이다. 초기에는 모피 상인들이 알류샨 열도를 중심으로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러시아는 알래스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통해 통치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1860년대에는 과도한 모피 채취, 경쟁 심화 등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러시아는 1867년 미국에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각하면서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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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령 아메리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공식 국명(루스카야 아메리카)
한국어 국명러시아령 아메리카
약칭러시아령 아메리카
건국 시기1799년
멸망 시기1867년
변천 1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설립
변천 2알래스카 구매
변천일 11799년 7월 8일
변천일 21867년 10월 18일
선대 국가알래스카 원주민
후대 국가알래스카주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국기
러시아 제국 국장 (러시아령 아메리카)
국기 링크주의 깃발
국장 링크러시아 제국 국장
1860년 러시아령 아메리카
수도노보아르한겔스크
공용어러시아어
하이다어
침시안어
에스키모알류트어
치누크 자곤
나데네어족
종교러시아 정교회
현재 국가
정치
원수 칭호러시아 황제
원수 1예카테리나 2세
원수 2파벨 1세
원수 3알렉산드르 1세
원수 4니콜라이 1세
원수 5알렉산드르 2세
원수 시대 시작 11784년
원수 시대 종료 11784년
원수 시대 시작 21799년
원수 시대 종료 21801년
원수 시대 시작 31801년
원수 시대 종료 31825년
원수 시대 시작 41825년
원수 시대 종료 41855년
원수 시대 시작 51855년
원수 시대 종료 51867년
총독 칭호총독
총독 1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총독 시대 시작 11799년
총독 시대 종료 11818년
총독 시대 시작 21863년
총독 시대 종료 21867년
지위러시아 제국식민지
역사
사건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설립
러시아령 아메리카
사건 날짜1799년 7월 8일
1867년 10월 18일
면적 및 지리
면적1,717,854
내수면 비율13.77
통화
통화루블
기타
관련 항목

2. 러시아 원정대의 탐험

러시아의 탐험가 세묜 데즈네프는 1648년 콜리마강에서 출발해 북극해를 거쳐 아나디리강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데즈네프 탐험대의 일부가 알래스카에 닿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없다. 데즈네프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에 보고되지 않아 시베리아북아메리카 대륙의 연결 여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1725년,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는 다시 탐험을 지시했다. 이후의 자세한 탐험 과정은 초기 탐험과 제2차 캄차카 탐험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1. 초기 탐험 (17세기~18세기 초)

1648년 러시아의 탐험가 세묜 데즈네프는 콜리마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항해, 아나디리강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데즈네프 탐험대의 일부가 알래스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데즈네프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에 보고되지 않아 시베리아북아메리카 대륙의 연결 여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1]

1725년,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는 다시 탐험을 지시했다. 1741년 6월, 제2차 캄차카 탐험(1733-1743)의 일환으로 비투스 베링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반도의 항구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출발했다. 두 탐험대는 곧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하였다.[2] 7월 15일, 치리코프는 프린스오브웨일스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선원들을 상륙시켜 북아메리카 북서 해안에 처음으로 상륙한 유럽인이 되었다.[3]

7월 16일경,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래스카 본토의 세인트이엘라스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10월에는 치리코프와 파벨 탐험대가 알래스카 발견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11월, 베링의 배는 베링섬에서 난파되었다. 베링은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페트르 탐험대는 강풍으로 인해 흩어졌다. 섬에서 겨울을 보낸 생존자들은 1742년 8월 난파선의 잔해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났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반도의 해안에 도착하여 탐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인들의 아메리카 정착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 2. 제2차 캄차카 탐험 (1733~1743)

1733년부터 1743년까지 진행된 제2차 캄차카 탐험의 일환으로, 1741년 6월에 덴마크인 비투스 베링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반도의 항구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원정을 시작했다.[6] 두 탐험대는 곧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6월 15일에 치리코프는 알래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켰다.[6]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래스카 본토의 세인트이엘라스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같은 시기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에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섬에 난파되었다. 그곳에서 베링은 병에 걸려 죽었고,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흩어졌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선원들은 섬에서 겨울을 버틴 후,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났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인들의 아메리카 정착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러시아인의 정착

베링 해협


초기 러시아 모피 상인들은 시베리아 해안에서 알류샨 열도로 항해했다. 시베리아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의 항해는 2년에서 4년까지 걸렸기 때문에, 선원들은 사냥터와 교역소를 설립했다. 1790년대 후반에는 알류샨 열도에 영구적인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모피 상인들의 절반 정도는 러시아 제국유럽 러시아나 시베리아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이었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출신 원주민이나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수중 동물을 직접 사냥하기보다는 알류트 족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을 선호했다.[7] 아메리카 지역에 모피가 풍부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 회사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알류트인들의 노예화도 더욱 심해졌다. 1763년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회사들에게 알류트 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촉구했다. 알래스카반도와 일부 섬의 상인들은 지역 알류트 족과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다른 상인들은 원주민들을 함부로 대했다. 노예로 삼기 위한 볼모 행위로 인해 가족들이 분열되었고,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도록 강요당했다. 무역상들 간의 모피 경쟁이 심화되면서 교역소들이 소수의 대기업으로 합병되었고, 이는 토착민들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냥감의 개체 수가 줄어들자, 알류트족들은 더 많은 수달을 잡기 위해 북대서양의 위험한 바다로 나가도록 강요당했다. 셸라이호프-레자노프 회사가 모피 회사를 독점하면서, 토착민들에 대한 식민주의적 착취는 체계적인 폭력으로 변하였다. 알류트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승리할 때마다 러시아인들은 즉각 보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보트와 사냥 장비를 파괴하여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질병이었다. 1741~1759년과 1781~1799년의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과의 교류로 인해 유라시아에서 온 감염병으로 알류샨인의 80%가 사망했다. 알류샨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질병에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8]

아메리카 식민지는 장거리 운항을 위한 비싼 운송비 때문에 수익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상인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경영하기로 결정했다. 1784년, 훗날 알래스카를 식민지화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창설한 그레고리 셸라이호프는 코디액섬에 ''Three Saints''와 ''St. Sirnon''의 배와 함께 정착했다.[9] 코니악 알래스카 토착민들이 러시아인들을 공격하자, 셸라이호프는 수백 명을 죽이고 볼모로 삼아 복종을 강요했다. 코디액섬에서 권한을 다진 후, 스리 세인츠만의 어널래스카섬에 두 번째 러시아인 정착지를 설립했다.

이후 러시아인의 알래스카 정착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174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초기에는 모피 상인들이 시베리아 해안에서 알류샨 열도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의 항해는 2년에서 4년까지 걸렸기 때문에, 선원들은 사냥터와 교역소를 설립했다. 1790년대 후반에는 알류샨 열도에 영구적인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모피 상인들의 절반 정도는 러시아 제국유럽 러시아나 시베리아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이었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출신 원주민이나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수중 동물을 직접 사냥하기보다는 알류트 족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을 더 선호했다.[7] 아메리카 지역에 모피가 풍부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 회사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알류트인들의 노예화도 더욱 심해졌다. 예카테리나 2세는 1763년에 여제로 즉위하면서 러시아 회사들에게 알류트 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촉구했다. 알래스카반도와 일부 섬의 상인들은 지역 알류트 족과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다른 상인들은 원주민들을 함부로 대했다. 노예로 삼기 위한 볼모 행위로 인해 가족들이 분열되었고,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도록 강요당했다. 무역상들 간의 모피 경쟁이 심화되면서 교역소들이 소수의 대기업으로 합병되었고, 이는 토착민들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냥감의 개체 수가 줄어들자, 알류트족들은 더 많은 수달을 잡기 위해 북대서양의 위험한 바다로 나가도록 강요당했다. 셸라이호프-레자노프 회사가 모피 회사를 독점하면서, 폭력 사태와 함께 토착민들에 대한 식민주의적 착취가 체계적인 폭력으로 변하였다. 알류트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승리할 때마다 러시아인들은 즉각 보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보트와 사냥 장비를 파괴하여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질병이었다. 1741~1759년과 1781~1799년의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과의 교류로 인해 유라시아에서 온 감염병으로 알류샨인의 80%가 사망했다. 알류샨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질병에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8]

아메리카 식민지는 장거리 운항을 위한 비싼 운송비 때문에 수익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상인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경영하기로 결정했다. 1784년, 훗날 알래스카를 식민지화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창설한 그레고리 셸라이호프는 코디액섬에 ''Three Saints''와 ''St. Sirnon''의 배와 함께 정착했다.[9] 코니악 알래스카 토착민들이 러시아인들을 공격하자, 셸라이호프는 수백 명을 죽이고 볼모로 삼아 복종을 강요했다. 코디액섬에서 권한을 다진 후, 스리 세인츠만의 어널래스카섬에 두 번째 러시아인 정착지를 설립했다.

바라노프가 알래스카에서 러시아인 거주지를 지키는 동안, 셸라이호프 일가들은 알래스카 모피 교역의 독점에서 이겼다. 1799년에 셸라이호프의 사위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차르 파벨 1세로부터 아메리카 모피 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하였고, 레자노프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이 거래에 따라, 차르는 회사 설립으로 새로운 알래스카 정착지를 개척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새로운 식민지화 프로그램을 확장해 나갔다.

3. 2. 1800년부터 1867년까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경영자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19세기경 러시아의 아메리카 영유권 주장 영역


1804년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새로운 경영자가 되었다. 이후 싯카 전투에서 트링기트 족과의 승리로 회사의 모피 무역권을 굳혔지만,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지는 못했다. 대부분 상인들은 해안가 지대를 선호하고 내륙 지방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1812년부터 1841년까지 러시아인들은 캘리포니아의 포트 로스를, 1814년부터 1817년까지 하와이의 엘리자베스 포트를 운영했다. 1830년대 이후, 러시아 회사의 무역 독점권은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에 의해 흔들렸다. 허드슨 베이 회사는 1839년 러시아령 아메리카 남쪽 끄트머리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1833년 영국 근거지 확립 저지를 위한 영국-러시아 임대차 계약이 1839년 체결되면서 수도관 설치를 통한 교역을 시작했다.

미국인들 역시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압력을 가했다. 바라노프가 미국 수송선에 의지하면서 미국인들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교역을 시작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러시아와 교역하던 중국 모피 시장에 관여하고, 미국 사냥꾼들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하면서 러시아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824년의 러시아-아메리카 조약은 북위 54도 40‘ 이북 지역은 러시아, 이남 지역은 미국의 모피 거래 권리를 규정했다. 이는 18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 협정은 잘 해결되었으나, 1818년 알렉산드르 바라노프의 은퇴와 함께 러시아의 알래스카 주도권은 약화되었다.

1821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헌장이 개정되어 해군 장교가 최고 책임자가 되도록 명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군 장교는 모피 장사 경험이 없어 회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헌장은 외국인, 특히 경쟁적인 미국인들과의 교류를 단절하는 내용을 담았으나, 이는 러시아 식민지가 미국 보급선에 의존하고 모피 고객층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허드슨 베이 회사와 협정을 맺어 러시아 영토 내 영국 선박의 영해 통과권을 허용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는 알래스카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해안가에 거주하며 러시아인과의 접촉과 전쟁에서 승리한 트링기트 족과 같은 알래스카 토착민의 생활 환경은 개선되었다. 트링기트 족은 러시아에 복속되지 않고 1850년대까지 세금 전쟁을 계속했다. 반면 알류트족은 고향에서 쫓겨나 러시아인을 위해 해달 사냥을 해야 했고,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정착하면서 1840년대까지 인구가 감소했다.

4. 선교사 활동

싯카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회.


셸라이호프는 스리 베인츠 만에서 원주민들에게 러시아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을 소개했다.[1] 1740년대에서 1780년대까지 알류트어로 번역된 예배용 신념 체계가 비공식적으로 퍼졌다.[1] 일부 모피 무역상들은 알류트 족 모피상 파트너를 대자녀로 입양하여 개인적인 연대를 통한 충성심을 얻기도 했다.[1] 선교사들은 토착민 착취에 반대했으며, 그들의 기록은 이 기간 동안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의 증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1]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같은 목가적 신앙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를 존중하고 토착민들의 교구 생활과 선교 활동 참여를 장려하는 전략을 사용했다.[2] 이러한 전략은 1만 명이 넘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정착민들에게 교회와 국가의 권위를 부여하여 토착민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식민지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은 812명을 넘지 못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싯카나 코디악섬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2]

이러한 설교 전략은 토착민 정체성에서 새로운 삶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3] 기독교는 혼합주의적 체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토착민 문화가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3] 현대 토착민 정체성은 알파벳과 알래스카 남부의 인종-언어학적 영향이 주요하게 작용한다.[3] 이반 베니야미노프 신부는 키릴 문자 방언을 활용하여 알류트족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3]

오늘날 알래스카에서 러시아 식민 시대의 흔적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90여 개의 러시아 정교회 교구와 2만 명에 달하는 토착민 신자들이다.[4] 이들은 유픽족에 속하는 아타바스칸 그룹에 포함되기도 한다.[4] 트링기트 정교회 교구 중 주노에 있는 가장 큰 교구는 러시아 정착민과 선교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식민 시대 이후 유일하게 정교회를 채택한 곳이다.[4] 러시아 정교회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참여는 기독교 의식 및 믿음과 토착민 문화가 융합되거나 혼성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4]

4. 1.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



셸라이호프는 스리 베인츠 만에서 원주민들에게 러시아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을 소개했다.[1] 1740년대에서 1780년대까지 알류트어로 번역된 예배용 신념 체계가 비공식적으로 퍼졌다.[1] 일부 모피 무역상들은 알류트 족 모피상 파트너를 대자녀로 입양하여 개인적인 연대를 통한 충성심을 얻기도 했다.[1] 선교사들은 토착민 착취에 반대했으며, 그들의 기록은 이 기간 동안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의 증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1]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같은 목가적 신앙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를 존중하고 토착민들의 교구 생활과 선교 활동 참여를 장려하는 전략을 사용했다.[2] 이러한 전략은 1만 명이 넘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정착민들에게 교회와 국가의 권위를 부여하여 토착민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2] 그러나 식민지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은 812명을 넘지 못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싯카나 코디악섬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2]

이러한 설교 전략은 토착민 정체성에서 새로운 삶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3] 기독교는 혼합주의적 체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토착민 문화가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3] 현대 토착민 정체성은 알파벳과 알래스카 남부의 인종-언어학적 영향이 주요하게 작용한다.[3] 이반 베니야미노프 신부는 키릴 문자 방언을 활용하여 알류트족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3]

오늘날 알래스카에서 러시아 식민 시대의 흔적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90여 개의 러시아 정교회 교구와 2만 명에 달하는 토착민 신자들이다.[4] 이들은 유픽족에 속하는 아타바스칸 그룹에 포함되기도 한다.[4] 트링기트 정교회 교구 중 주노에 있는 가장 큰 교구는 러시아 정착민과 선교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식민 시대 이후 유일하게 정교회를 채택한 곳이다.[4] 러시아 정교회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참여는 기독교 의식 및 믿음과 토착민 문화가 융합되거나 혼성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4]

캘리포니아와 남서부에 위치한 스페인계 로마 가톨릭교회의 식민지적 의도, 방법, 결과는 부르고스 법과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 감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5] 만약 식민 지배 강도가 더 강했다면, 토착민들은 그들의 전통이 반영된 기독교를 창조했을 것이다.[5]

4. 2. 가톨릭과의 비교

캘리포니아와 남서부의 스페인계 로마 가톨릭교회는 부르고스 법을 시행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은 지역 문화를 존중하고 토착민 지도력을 증진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1] 이는 1만여 명이 넘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정착민들에게 교회와 국가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아 토착민으로부터 충성심을 얻기 위함이었다.[1] 그러나 실제 거주 러시아인은 812명을 넘지 못했고, 대부분 싯카나 코디악섬에 집중되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1]

5. 러시아의 아메리카 매매

러시아의 아메리카 매매서


1860년대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피를 얻기 위한 밀렵과 동물 개체 수 감소,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경쟁 심화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1867년 러시아는 미국에 1에이커당 2센트, 7200000USD에 알래스카를 매각했고, 러시아령 아메리카에 대한 모든 권리도 함께 넘겼다.

기록에 따르면, 현지 트링기트 부족 노령자들은 러시아인들이 팔려는 지역인 캐슬 힐에서 거주했다. 다른 토착민들은 미국인이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했다고 주장하며, 영토를 빼앗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의 지역에 대한 권리는 20세기 후반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알래스카 토착민의 거주지 주장 조약을 통해서야 비로소 얻게 되었다.

러시아 아메리카 전성기에 알류트인은 4만 명이었지만, 러시아인은 7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인과 크리올들은 3년 안에 미국 시민권을 얻을 기회를 얻었으나, 제퍼슨 콜롬버스 데이비스 장군은 싯카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을 쫓아내고 미국인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러시아인들은 미군의 난폭함에 불만을 품고 대부분 러시아로 돌아갔으며, 나머지는 캘리포니아와 북태평양 지역으로 이주했다.

5. 1. 매각 배경



1860년대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피를 얻기 위한 밀렵과 동물 개체 수 감소,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경쟁은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보호할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5. 2. 매각 과정 및 결과



1860년대에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피를 얻기 위한 밀렵과 동물 개체 수 감소,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경쟁 심화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보호할 필요성을 잃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는 미국에 1에이커당 2센트, 7200000USD에 알래스카를 매각했고, 러시아령 아메리카에 대한 모든 권리도 함께 넘겼다.

현지 트링기트 부족 노령자들은 러시아인들이 팔려는 지역인 캐슬 힐에서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토착민들은 미국인이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했다고 주장하며, 영토를 빼앗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의 지역에 대한 권리는 20세기 후반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알래스카 토착민의 거주지 주장 조약을 통해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러시아 아메리카가 번성했을 때 알류트인은 4만 명이었지만, 러시아인은 7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인과 크리올들은 3년 안에 미국 시민권을 얻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제퍼슨 콜롬버스 데이비스 장군은 싯카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을 쫓아내고 미국인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러시아인들은 미군의 난폭함에 불만을 품고 대부분 러시아로 돌아갔으며, 나머지는 캘리포니아와 북태평양 지역으로 이주했다.

6. 역사


  • 1741년, 덴마크인 비투스 베링이 러시아 황제의 요구를 받아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
  • 1784년,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에서 알류샨 열도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코디액 섬에 거점을 두었다.
  • 1799년,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로서 알래스카의 영유를 선포했다. 동시에 시트카로 거점을 옮기고 통치를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 맡겼다.
  • 1800년,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러시아 루블을 1/3 절하했다.[4]
  • 1821년,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알래스카를 영유했다.
  • 1822년, 러시아가 로스차일드로부터 600만파운드의 차관을 받았다.[5]
  • 1824년, 미국과 국경을 획정했다. 러시아는 북캘리포니아와 남북 양쪽 오레곤에서 철수했다.
  • 1861년,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로부터 행정권을 회수했다.
  • 1867년,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패한 후 재정적으로 곤궁해졌고, 영국이 알래스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10월 18일 720만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In Darkest Alaska: Travels and Empire Along the Inside Passage https://books.google[...]
[2] 서적 Russians in Alaska, 1732–1867
[3] 웹사이트 Russia's Great Voyages http://www.calacadem[...] 2020-05-04
[4] 기타
[5] 서적 The Beginnings of Russian Industrialization 1800–1860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calacadem[...] 2014-09-24
[7] 서적 American Colonies: The Settling of North America Penguin Books, New York
[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alaska.ne[...] 2007-11-02
[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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